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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구.바드리시오입니다.


제목 : 서를 청하고 베풀 용기
옮긴 글   2019-12-03 03:24:31, 조회:46, 추천:0
      
       
      
      서를 청하고 베풀 용기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가장 직면하기 힘든 주제를 꼽으라면 단연 ‘용서’일 것이다. 
      어쩌면 ‘용서’는 신자들이 사제들의 강론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주제지만, 
      ‘용서’와 관련된 내용이 신자들의 마음에 얼마나 머물러 있을지, 또 실천으로는 얼마나 
      옮겨질지 알 수 없다.
      
      
      ‘용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그동안 필자가 가톨릭교회에서 ‘용서’와 관련하여 글이나 말로 접한 가르침을 모아 
      요약하면 다음과 비슷할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은 먼저 ‘용서’를 핵심 메시지로 담은 성경 말씀을 들려주고, 
      특히 어느 대목에 머물러 성찰을 하고 싶은지 찾게 한다. 그리고 강론이 이어진다.
      
      “여러분은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콜로 3,12-15).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당신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인 스테파노 성인도 예수님을 본받아 그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청하며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보여주신 사랑은 용서입니다. 
      죽기보다 더 힘든 게 용서라는 걸 예수님도 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자신이 생명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용서를 실천하신 것은 결국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에 미움과 증오를 쌓는다면 결국은 나 자신을 어두운 죽음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두 가지의 요소, 곧 화해와 치유를 내포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첫째, 화해란 마음의 상처로 거리가 멀어졌다 해도, 서로에게 끼친 잘못을 솔직하게
       말하면서 평화롭게 또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치유란 죄의식, 불신과 내면의 상처가 사라지고, 내면의 평화와 기쁨, 더 큰 사랑과
       성장으로 그 자리를 대신해서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용서란 다른 사람을 나에게 맞추도록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들이도록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만이 진정 내적인 평화와 자유를 주고 삶을 더욱 풍요롭고 가치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교황님 말씀의 초점, ‘그냥 용서를 구하라’
      
      교회의 가르침은 ‘용서’를 고려해야 할 상황이 개인적인 차원인지 사회적인 차원인지를
       가리지 않으며 또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므로, 위 강론처럼 흠잡을 데 없이 옳은 
      내용을 담고 있다.
      
      ‘흠잡을 데 없이 옳은’ 가르침은 무엇보다 ‘내적인 평화와 자유를 얻으려면 네가 먼저 
      용서를 베풀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도 ‘용서’가 죽기보다 힘들다는 걸 아셨다는데, 신자인 우리가 ‘용서’를
       버거워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2014년 여름, 한국을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용서’와 관련된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다.
      시기적으로 마침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은 광복절(8월 15일)이 끼어있었고, 
      124위 순교자 시복 미사가 예정된 상황, 또 바로 4개월 전 세월호 참사를 당한 유가족과
       한국민들의 정서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용서’라는 메시지 전달은 교황님의 사목방문
       일정에 중요한 주제였을 것이다.
      
      ‘용서’에 관한 교황님의 메시지가 가장 강력하게 전달된 것은 아시아 청년대회의 강론이
      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이 보여준 ‘돌아온 탕자에 관한 연극’에 대한 논평을 겸하여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복음은 아버지가 멀리서 그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를 보았을까요?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는지 보려고 날마다 지붕에 올라가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아들이 준비해 둔 말을 하도록, 심지어는 
      용서를 청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았습니다. 
      밖으로 나가 잔치를 벌였습니다.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잔치입니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 
      그분께 돌아갈 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잔치입니다”(2014년 8월 15일, 아시아 
      청년들과의 만남 연설).
      
      교황님께서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미래의 희망’이라 일컬으며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쏟고 계신 젊은이들은 이 말씀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잘못을 후회하며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 쪽에 감정이입을 
      했을까? 
      아니면 용서를 청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오히려 큰 잔치를 벌여 아들을 환대하는 
      아버지 쪽이었을까?
      
      엄청난 두려움을 누르고 아버지를 대면하러 가는 아들에게도, 아무 조건 없이 아들을
       포용하는 아버지에게도 큰 용기가 필요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용서’하는 데 지치시는 법이 없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환대할 준비를 하고 계시니, 
      작은 죄든 큰 죄든 죄에 연연하지 말고 ‘그냥 용서를 청하라.’는 것이 교황님 말씀의 
      초점이다. 
      용서를 청해야 할 대상이 하느님이든 이웃한 인간이든 구분을 두지 않으신다.
      
      
      실천적 행동에 바탕을 둔 교황님의 가르침
      
      ‘용서’와 관련된 교황님의 가르침은 당신의 실천적인 행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최근 교황님은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에 대한 용서를 위하여 사제단을 각국에 파견할 
      계획을 발표하시고,  낙태와 관련한 용서는 해당 여성뿐만 아니라 낙태수술을 한 의사와
       간호사도 포함된다고 말씀하셨다(2015년 5월 8일 자, 연합뉴스 참조).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6월 말, 교황님은 중세에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이단으로
      몰렸던 발도파 교회를 직접 찾아가시어 수백 명의 신도에게 “가톨릭교회가 비기독교적
      이고 심지어 비인간적인 태도와 행동을 보였던 것에 대해 사과한다.”고 밝히셨다(2015년
       6월 22일 자, 연합뉴스).
      
      이어 7월 초, 볼리비아를 방문하시어 원주민 단체와 운동가들을 만나 식민지배에 대해 
      연설하시면서, “신의 이름으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중대한 죄를 많이 저질렀다.”라고
       고백하셨다.
      
      또한 교황님은 “교회의 잘못뿐만 아니라 이른바 ‘아메리카 정복시대’에 교회가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해 겸허히 용서를 구한다.”면서, “칼의 논리에 강력
      하게 반대한 수많은 성직자도 있었음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볼리비아
       원주민 지도자 아돌포 체우로베스는 “우리가 원했던 것 이상의 사과였다.”며 교황님의
       사과를 받아들이겠다는 소감을 전했다고 한다(2015년 7월 10일 자, 오마이뉴스).
      
      가톨릭교회 안팎의 일부 보수세력은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을 용서한다거나, 
      가톨릭교회가 지난날에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해 용서를 청하시고, 이혼과 재혼한 
      사람들과 동성애자들도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시는 교황님의 행동에 ‘파격행보’라며
       비판의 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종교를 불문하고 사람들 대부분은 교황님의 용기 있는 행동에 힘찬 응원을 
      보내고 있다. 
      일부이긴 하지만, 용서를 통한 화해와 치유의 가르침을 선포하던 지도자가 일상의 
      삶에서는 용서는커녕 선한 마음 한 자락도 나눠주지 않는 태도를 보일 때 느끼게 되는
       허망한 기분과는 정반대의 경험이어서 더욱 반갑다.
      
      
      긍정의 교환과 부정의 교환
      
      그런데 교황님의 사례까지 만나보아도 신자 개인의 일상에서 ‘용서’라는 주제를 편안히 
      대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여기서 시각을 좀 달리해 보자. ‘용서해 주거나 용서를 청해야
       할’ 상황은 관계에 어떤 불화가 생겼다는 것, 다시 말해 관계에서 주고받기가 불균형
      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버트 헬링거의 가족 세우기 이론[the theory of fam
      ily constellation] 참조).
      
      물질이든 마음이든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뤄야 관계가 편안하게
       유지된다. 
      예컨대, 누군가에게서 선물을 받으면 먼저 기분은 좋지만, 곧 선물을 준 사람에게 보답
      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부담을 갖는다. 선물 주고받기라는 긍정적인 일에서조차 관계의
       균형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친절을 베풀면 기분이 좋고 그 사람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게 되지만, 
      멋진 선물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부담을 갖는다. 받은 사람은 상대에게 무언가 
      돌려줌으로써 이런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그럴 때 받은 사람은 기분이 좋은 상태여서 선의의 행동을 조금 더 얹어서 상대에게
       돌려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교환이 반복될 때마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선의는 커진다. 이게 바로 좋은 
      관계에 담긴 ‘긍정의 교환’이다.
      
      ‘부정의 교환’도 존재한다. 그것은 상대와 나 사이에 상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주고받을
       때 일어난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균형을 맞추려는 압박감에서 자신의 복수가 정당하다는 생각이 들고, 
      따라서 상대에게 자신이 받은 상처보다 조금 더 얹어서 돌려주고 싶어진다.
      한두 마디 말로 상처를 준 상대에게 열 마디 비난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이처럼 상처 주고받기는 결국 관계를 파괴한다.
      ‘부정의 교환’을 해결하는 방법은 균형의 회복을 위해서 돌려는 주되, 조금만 줄여서 
      돌려주자는 것이다.
      
      
      조금 줄여서 돌려주기를 실천하자
      
      ‘긍정의 교환’이든 ‘부정의 교환’이든 측정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긍정의 교환’이 
      자연스럽게 상승작용을 하는데 반해, 상대에게서 받은 부정적인 감정이나 행동을 줄여서
       돌려주기를 실천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조금 줄여서 돌려줄지를 
      고민하다 보면 불화가 빚어진 상황과 상대방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또한 그러는
       사이 상대에 대한 나쁜 감정이 줄어들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줄여서 돌려주기’를 위해 잠깐이나마 ‘생각할 시간 만들기’라는 새로운 선택을 하는 순간, 
      전에 자주했던 즉각적이고도 부정적인 반응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정의 교환’을 줄이고자 생각할 방법으로는, 흔히 장난처럼 말하는 ‘소심한 복수’나
       ‘진지하기보다 
      유머가 섞인 복수를 선택하기’ 등, 상처가 되는 부정의 교환을 긍정의 교환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럴 때 서로 화해를 청하거나 받아들이기도 쉽고, 주고받은 상처도 오래 남지 않게 된다.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받아 ‘용서’를 문제 삼아야 할 상황에서 돌려는 주되 조금 덜어서 
      돌려주어 관계의 균형을 맞추자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에게 해를 끼친 상대에게 아무 조건없이 용서하라.”는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 불가능
      하고 비실용적이며 때로는 거부감을 주는 가르침’보다 신자들이 선택하기에 훨씬 수월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둘째 아들에게 잔치를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택은 ‘부정의 교환’을 ‘긍정의 교환’으로 바꾼 완결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심이 큰 사람,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용기가 큰 사람이 ‘긍정의
       교환’으로 더 쉽게 방향을 틀 수 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의
       교환으로 방향을 바꾸는  용기를 발휘해 보자. 웃으며 계획하는 소심한 복수가 용서를
       해야할 일을 줄이는 연습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 박은미 헬레나 - 주교회의 여성소위원회 총무.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연구교수로서 
      대학과 가톨릭교회 내에서 교육과 연구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품 심리상담센터’를
       운영하며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일본 히도쯔바시(一橋)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5년 9월호, 박은미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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