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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구.바드리시오입니다.


제목 : 관리직 노비, 대기업 이사급 파워 가졌다
옮긴 글   2018-11-08 23:51:28, 조회:137, 추천:5
      
       
      ▲ SBS <뿌리 깊은 나무>에서 백정 일을 하는 정기준(윤제문 분).  
      ⓒ SBS  백정 
       
       
      SBS <뿌리 깊은 나무>에서 비밀조직 '밀본'은 왕권중심주의에 맞서 '사대부가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그런데 사대부 세상을 꿈꾼다는 이 조직의 수장이 
      한동안 백정 일을 했다. 리더 정기준(윤제문 분)이 가리온이란 가명으로 
      반촌(조선시대 대학가)에 잠입해 가축 도살을 하며 밀본을 지도했던 것이다.  
      
      신분이 탄로나 반촌을 탈출하기 직전까지, 백정 가리온은 세상에서 가장 천한 사람의 
      이미지를 띠었다. 복장도 그랬고 태도도 그랬다. 가리온이란 이름 자체가
       '몸은 희고 갈기가 검은 말'을 지칭하니, 이름에서부터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그런 가리온이 자신이 가장 증오하는 세종(한석규 분)을 위해 심부름도 하고 
      고기도 구워주고 했으니, 임금 세종과 백정 가리온의 대비는 곰곰이 생각하면 
      꽤 흥미로운 설정이다.   
      
      우리는 노비가 사회적 천대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가리온 같은 백정이 사회적 천대를 받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백정과 노비 중 어느 쪽이 더 천했을까? 양쪽 다 똑같이 천했을까? 
      아니면, 위아래가 있었을까? 이 애매한 문제를 정리해보자. 
      
       집에 기와를 올릴 수도, 갓을 착용할 수도 없었던 백정
      
      백정은 겉모습에서부터 일반인과 구별되었다. 그들은 거주지나 복장 측면에서 
      '하류인생'이었다. 그들은 집에 기와를 올릴 수 없었고, 몸에 갓이나 망건 등을 
      착용할 수 없었다. 그들의 의복에는 쇠가죽 털이 달렸기에, 길에서 보면 
      누가 일반인이고 누가 백정인지 금방 구분할 수 있었다. 
      
       백정이 천시를 받은 것은 그들의 직업 때문이었다. 
      그들의 업이 사농공상(士農工商)처럼 공인된 직업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농업사회의 특성과도 괴리를 보였기 때문이다. 농업 생산에 가장 긴요한 
      가축인 소를 도축했으니, 농업사회에서는 이들이 천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정은 법적으로는 달랐다. 그들은 신분상으로는 양인(良人), 
      즉 자유인이었다. 세종 5년 10월 8일자(1423년 11월 10일) <세종실록>에 
      기록된 것처럼 백정은 "본시 양인"이었다. 그래서 법적으로는 천민이 아니었다. 
      
       
       
      ▲ 일제시대의 백정조합인 형평사(衡平社) 대표단이 일본의 천민운동단체인 
      전국수평사(全國水平社, 젠코쿠스이헤이샤)를 방문해서 찍은 사진.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형평사 
       
       
      이에 비해, 노비는 외형상으로는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노비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했고, 상업이나 수공업에도 종사했다. 
      외형상으로는 농민·상인·수공업자의 모습을 띤 것이다.
      
      이익의 <성호사설> 권7에 따르면 노비 시인 백대붕처럼 문단에서 활약하는 
      선비 스타일의 노비도 적지 않았고,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따르면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사회적 존경을 받는 노비들도 있었다. 농공상(農工商)뿐만 아니라 
      사(士)를 업으로 하는 노비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는 소수 혹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노비는 농공상에 종사했다.     
      
      법적으로 타인에 예속돼 천대를 받았던 노비
      
      조선시대 전체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최하 30~40% 이상인 데다, 
      겉모습 또한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노비와 양인 등을 
      분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노비는 가장 일반적인 
      노동자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평균적인 샐러리맨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노동자가 GNP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다면, 
      과거에는 노비가 그런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간에, 이들은 법적으로 남에게 예속된 사람들이었다. 
      설령 서당에서 훈장 일을 하는 노비일지라도, 그는 정기적으로 주인을 찾아가
       신공(공물)을 납부해야 했고 또 주인의 판단에 따라 매매나 상속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노비는 겉모습이나 직업이 천해서가 아니라, 법적으로 타인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사회적 천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직업이나 옷차림·주거지만 놓고 보면, 노비가 백정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었다. 노비는 양인과 거의 구분되지 않은 데 비해 백정은 확연히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노비가 백정을 놀릴 수는 있어도 백정이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백정이 보기에는 누가 노비이고 누가 양인인지 식별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노비는 공인된 직업에 종사한 데 비해 백정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노비와 백정이 서로 상대할 때는 아무래도 노비가 우위에 설 수밖에 없었다. 
      법적으로는 백정이 나았지만, 현실적으로는 노비가 나았던 것이다. 
      
       만약 관리직에 종사하는 노비를 상대할 경우, 백정은 그런 노비를 하늘처럼 
      떠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노비들은 오늘날의 대기업 이사에 못지않은 
      파워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비와 백정이 싸우면, 국가는 누구 편을 들까
      
      조선 전기에 홍문관 부제학(차관보급)을 지낸 이맹현(1436~1487)의 가문에는 
      752명의 노비가 있었다. 태조 1년 8월 20일자(1392년 9월 7일) <태조실록>을 보면, 
      1천 명 정도의 노비를 보유한 가문들도 꽤 있었다. 이런 기업형 가문에서는 
      노비 간에 서열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고, 그중 상층부는 여타 노비와 확연히 
      구별되는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밖에 없었다. 
      
       또 관청에도 수노(首奴)라는 노비가 있어 여타의 노비들을 관장했다. 
      이런 수노들은 스스럼없이 관청 고위직 인사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양인들은 그들을 상대할 수조차 없었다. 
      백정이 이런 관리직 노비에게 "나는 그래도 양인인데"라며 거드름을 피울 
      수 있었을까.  
      
      
       
      ▲ 경기도 수원 팔달문 앞에 있는 조선시대 사람들. 
      노비는 일반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았다. 
      사진은 서울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 복도에 전시된 사진.  
      ⓒ 김종성  팔달문 
       
      
      이렇게 법적 신분과 관계없이 직업적으로는 노비가 백정보다 우월했지만, 
      그렇다고 노비가 백정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노비가 백정을 하대할 수는 
      있었지만, 싸움이 나서 '치안센터'에 끌려갔을 경우에는 노비가 불리했다. 
      이런 경우, 국가는 백정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형법인 대명률을 차용했다. 대명률에 따르면, 
      노비가 양인을 폭행한 경우에는 양인이 양인을 폭행한 경우보다 1등급 가중해서 
      처벌했다. 양인이 불구가 되거나 치료 불가능이 되면 노비를 교수형에 처했고, 
      양인이 죽은 경우에는 참수형에 처했다. 반면, 양인이 노비를 폭행한 경우에는 
      양인이 양인을 폭행한 경우보다 1등급 감해서 처벌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비와 백정이 싸울 경우에는 노비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법적으로는 백정도 양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노비는 백정을 하대하더라도, 
      주먹을 부를 만한 언행은 가급적 자제해야 했다. 
      
      노비는 국가가 공인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백정은 그렇지 않은 직업에 종사하는데도, 
      이런 경우에 국가가 백정 편을 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에는 체제유지를 
      위한 경제적 고려가 담겨 있었다. 
      
       노비들은 농업생산의 상당부분을 책임졌다. 국가 소유나 양반 소유의 땅을 
      경작한 것은 주로 노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비가 법적으로 유리한 지위를
       갖게 되면, 지주(국가·개인)가 노비를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농업생산 증대 위해 법적으로 노비 차별
      
      노비가 주인과의 관계에서는 물론이고 일반인과의 관계에서도 법적으로 열악한 
      지위에 놓일 경우, 노비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야만 노비는 
      더욱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가는 농업생산 및 조세수입의 증대를 
      위해 노비를 법적으로 차별했다. 
      
      백정이 파업하면,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된다. 고기는 안 먹어도 상관없다. 
      노비가 파업하면, 밥을 먹을 수 없게 된다. 밥은 안 먹을 수 없다. 
      백정의 파업은 경제체제에 위협을 주지 않지만, 노비의 파업은 경제체제에 
      심대한 위협을 준다. 
      
      그러므로 노비의 파업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형법적으로 차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라도 그들을 때릴 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국가는 생산대중을 고용주의 통제 하에 묶어두기 위해 다양한 
      기법을 고민하기 마련이다. 이런 전략적 고려에서 노비를 형사상 차별하다 보니,
       법적으로 양인인 백정이 그로 인한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백정이 천할까, 노비가 천할까'라는 이 애매한 문제를 간략히 정리해보자. 
      직업적으로는 백정이 천했다. 신분적으로는 노비가 천했다. 
      어느 쪽이 더 천한가는, 양쪽이 폭행에 휘말렸을 경우에 잘 나타났다. 
      이 경우 법은 백정의 편을 들었다. 그러므로 노비가 백정보다 더 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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