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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조선시대 민화
한마음   [누리집] 2010-06-12 09:46:39, 조회:1,990, 추천:26
    
    1 민화 명칭에 대한 이해
    
    민화는 사실상 미술사학계의 공인된 개념 없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민화의 명칭에 대한 문제는 애초부터 많은 학자들이 비판적으로 제기한 바 있지만, 
    민화라는 용어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민화에 정식으로 이름을 부여한 사람은 일본인 학자 야네기 무네요시柳宗悅(1889-
    1961)이다. 한국에서는 조자용에 의해 민화라는 명칭이 각광을 받았지만, 
    조자용이 민화라고 부르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야네기 무네요시의 영향을 받았
    다고 본다.
    
    또한 조자용은 민화를 서민은 물론 도화서 환원을 비롯해 다양한 계층과 신분의 
    사람들의 그림으로 이해했다. 
    
    한편 김호연은 민화를 민족의 미의식과 정감이 표현된 겨레그림으로 정의했다. 
    이처럼 공인된 개념 없이 막연하게 "민화, 겨레그림, 우리그림"2)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민화를 포괄적으로 정의한 사람은 없는 바"3), 민화의 명칭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민화가 그려졌던 당시에는 속화라고 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18세기에 
    들어서서 종래의 화목畵目에 없던 그림들이 다양하게 등장했는데, 세속적인 
    내용을 그린 그림도 속화, 세속에서 치레그림으로 장식하는 그림도 속화라고 
    불렀다.
    
    속화라고 하면 우리는 민화를 떠올리게 되는데, 당시에는 단원이나 혜원의 
    풍속화 유의 그림도 속화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속화라는 말은 장르의 개념
    이라기 보다는 공식적인 장르에 없는 그림이라는 뜻이 강한데, 속화의 탄생과 
    유행은 곧 장르 개념의 해체 현상으로 보인다.
    
    민화를 상층신분의 불쾌감으로 속화라고 불렀으며, 정통 회화의 범주에서 벗어
    났다는 이유로 잡화, 속화, 별화 등으로 불리우며 천시 받았던 것이다.
    
    사실 새로운 사회적 기류에는 기존의 규범과 형식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내용적 
    변화가 따르게 되는데, 당시 지배층의 교양과 멋의 상징물이던 그림을 세속
    에서도 적절히 변용 시키면서 횽내 내는 도전과 확산이 이루어 졌다고 본다.
    
    민화를 속화라고 한 것은 향가나 향악을 외래적인 것과 구별하는 우리의 토착 
    문학이나 음악으로 호칭했던 것처럼, 우리 본래의 그림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민화의 명칭에 대해 시비를 논할 입장에 있지 않다.
    
    겨레그림, 민중그림, 민화, 속화 등의 명칭에 대해서 알맞은 지는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민화라는 명칭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고 이제는 민화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고 보편화되어 
    민화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자 한다.
    
    2. 민화의 기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민화들은 거의 모두 조선시대 후기에 그려진 것이다.
    
    그러나 민화의 연원은 그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민화에 있어서 그 뿌리가 
    상당히 깊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화의 몇몇 주류를 조선후기 민화에서만 찾는 
    것은 출발부터 잘못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구체적으로 민화를 역사적으로 볼 때 단순히 조선조 후기에 나타난 국지적이고 
    경향적인 어떤 미술 현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엄밀히 말해서 민화는 
    선사시대의 모든 원시 미술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고, 특히 우리들의 경우에 
    있어서 민화가 갖은 소재나 주제들은 청동기나 석기 시대의 암각화에 이어지며 
    보다 많은 공통점들이 삼국 시대의 고분벽화나 그 유물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민화의 맥락을 이렇게 통시적으로 깊게 설정하면, 이들 민화로 불리는 그림들은 
    유구한 전통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석기 시대의 기하학적으로 단순화되어 그려진 선화나 암각화 등은 분명하게
     민중회화의 성격을 띠고 있다.
    
    
    또한 민화는 삼국시대의 고분 벽화로 그려졌던 사신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사신도에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네 가지 상징동물, 
    즉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가 각각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특히 
    호랑이와 용은 조선시대 민화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고분 문화시대에 널리 
    통용되던 어떤 체계적이고 상징적인 의미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민화의 호랑이와 용의 상생 상극은 사신도의 청룡과 백호의 미묘한 
    상관 관계에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신도의 네 마리 동물 형상은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내려오면서 사람들에 
    의해 되풀이 그려지고 정형화되어 조선시대 민화를 낳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민화는 조선후기 자생한 것이 아니라 고급회화를 오랜 세월 동안 되풀이 
    모방하는 데에서 서서히 형성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분벽화를 그리던 시대가 지난 뒤, 이들 벽화의 주제들은 귀족층의 가옥 내에 
    그려졌을 것이다. 더러는 담 벽이나 병풍 등, 또는 종이에 그려져 벽장이나 
    문짝 등에 그려졌다.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귀족층 집안에 장식했던 그림들은 
    서민들의 생활 공간 속에 흡수되어 들어와 되풀이되어 그려지고 정형화되면서 
    민화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때 민화로 정착되어 간 벽화과정은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매우 불규칙하고 혼돈된 상태에서 이루어 졌다.
    
    
    
    2-1, 조선 시대의 세화 풍습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세화에 대한 기록이 상당 수 있다.
    
    세화는 벽사, 액막이 그림으로 사용 목적상 일회용이었다.
    
    "김매순金邁淳(1776-1840)의 열양세시기 陽歲時記를 보면, 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화歲畵는 세배歲拜, 세찬歲饌, 설빔 등과 함께 
    설날의 대표적 풍속 중 하나였다. 정월 초하루 날 이른 새벽에 대문에다 각종 
    그림을 붙여서 잡귀가 들지 못하도록 하는 방맥이 그림(벽사도, 액막이 그림)
    이라고 하였다."4)
    
    "또한, 세화의 내용에 대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홍석모洪錫謨의 동국 
    세시기 東國 歲時記(1849-)의 내용을 보면, 도화서에서는 수성壽星, 선녀仙女, 
    직일장군直日將軍의 그림을 그려 임금에게 드리고, 또 서로 선물하는 것을 
    이름하여 세화라 하였다고 한다."5)
    
    궁중용, 민간용 세화에는 해석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궁중용으로 고운高雲, 
    심사정沈師正, 김양기金良驥 등의 작품으로 전해오는 「송호도松虎圖」등이
     모두 같은 도상이면서 매우 위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민간의
    「호랑이와 까치」는 변형이 강하고 모습도 해학적이어서 이것이 수요층의
     취미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중종5년(1510)에는 세화의 낭비를 논한 기사가 있는 바, 민수천閔壽千이 
    아뢰기를 세화는 국초부터 이어온 예이지만 국초에는 불과 60장이었는데 
    나라가 바야흐로 경비를 줄여야 할 이 때에 한 사람이 20장을 받아 3개월을 
    그려야 하니, 이는 대단히 낭비이므로 국초의 예에 따라 화지畵紙를 줄여야
     한다고 하여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세화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사실이 된다.
    
    
    
    2-2, 조선 후기 사회적 배경
    
    조선시대의 문화는 18세기, 영조, 정조 두 임금의 치세治世에 꽃을 피우게 
    되었다. 실제로 민속문화의 원형의지가 싹텄던 17세기는 정치적으로 사대
    주의에 대한 비판의 기류가 있었고, 사상적으로는 실학사상에 나타나는 
    자연과학에 대한 열의가 고조되었던 시기이다. 또한 18세기에는 전반적인 
    경제력 성장에 따라 하층 평민 가운데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 새로운 계층이 
    증가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삶의 질이 향상되었던 시기이기
    
    도 하다.
    
    예컨대 "하층민의 신분적 향상이 나타났는데, 18세기 초인 숙종 말년에 전 
    국민의 9내지 10%에 불과했던 양반이 18세기 말인 정조 연간에는 20%까지 
    상승하고, 19세기 중엽인 철종 무렵에는 60%까지 는다."6)
    
    이처럼 그 수가 늘어난 양반들은 자신도 양반임을 생활문화에서 보여줄 
    필요를 당연히 느꼈을 것이고, 그것이 급기야 치레 그림의 일반적 유포를 
    가져오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
    
    하층민이 상층민의 문화적 영역을 탈취하여 신분상승욕구를 드러내는 단계를 
    넘어 하층민 일반에 유포되는 단계로 들어서면 그 도상은 본래의 의미를 잃고 
    다양한 형식의 난무 상태를 이루게 된다.
    
    18세기에 확립된 문화적 성과물들은 더 이상 일부 문화 담당 층의 전유물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중인, 서출, 서민의 문화적 역량이 고조되었다.
    
    이처럼 당대의 민화는 사대부 층의 미감을 기준으로 하여 비록 치졸하고 
    못나 보이지만 조선후기의 사회변동과 맞물려서 민간의 생활문화에 변화를 
    불러 일으켰고, "구수한 흙 냄새와 진실한 자기표현과 그로 말미암은 순수한 
    개성의 세계가 표현되었던 것 있다."7) 
    
    "사실, 조선 초기부터 화공들은 미적 감각에 있어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편인데,. 
    조선 미술이 다른 시대에 비해서 보다 솔직하게 자기의 감정이 나타나는 원인
    이기도 하다."8) 특히,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민화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언제나 
    기존 미술이 지향하는 중요한 미적 규범을 깨뜨리면서 나오는데, 그것을 
    후대의 미술사가들은 파격으로 분류하면서 좀처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편, 정조시대를 넘어선 19세기 순조 연간으로 들어오면서 조선후기의 성숙한 
    문학상이 양적으로 확산되어 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퍼져나갔다.
    
    당시에는 민중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봉건사회의 해체가 드러나고 있었는데, 
    봉건 사회 해체기에 드러나는 사회변동이 추이, 곧 서민의식, 민중의식의 
    성장에 따른 민중의 미의식과 생활 문화의 독자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외세와 이에 대응하려는 국수주의적 세력의 갈등으로 양반사회를 
    뒷받침하던 모든 제도가 그 기능을 상실해 갔으며, 과거제도 역시 그 운영이 
    문란하여 폐단이 심했으며, 신분질서의 붕괴가 더욱 심화되면서 집권층의 
    문란이 민중에 대한 압박으로 강화되는 상황이 있었다.
    
    당대에 화원이 존재했으나 그 의의가 퇴조했었고 오히려 무명의 화가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었으며, 민화의 내용이 더욱 더 다양화되고 자유분방한 
    표현으로 변화되었다.
    
    "피지배층이 이처럼 지배층과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갖게 된 것은 자신들의 
    인간적 존재에 대한 자각이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이른바 서민의식, 
    민중의식의 대두 없이 서민, 민중예술이 나타날 수 없는 법이다."9) 예컨대 
    판소리, 탈춤, 남사당놀이 같은 향악, 향속이 민중 사이에 널리 유행하던 
    시기가 아니었다면 민화도 그렇게 널리 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2-2-1, 민화의 발생
    
    세화의 풍속이 민간에게도 퍼져 오늘날 민화라고 불리는 것의 한 연원이 됐다.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49》에, 세화歲畵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민화의 발생에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살펴보면 "도화서圖畵署
    에서는 수성壽星, 선녀仙女, 직일장군直日將軍의 그림을 그려 임금께 드리고 
    또 서로 선물하는 것을 이름하여 세화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러 관가와 임금의 
    친척집 문짝에도 모두 이것을 붙인다. 여염집에서도 이를 본뜬다."10)라고 
    적혀있다.
    
    관화원이나 직업적인 화가들은 왕이나 사신들이 수행하면서 기념비적이거나 
    정황 참작을 위해 기록화를 그렸고, 나라의 지배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발간물에 
    삽도를 그리기도 했다. 물론 사대부 출신의 화가들은 여전히 수묵을 치거나 
    문인화라고 불리는 철학적인 그림을 그렸다.
    
    미술을 포함한 문화적, 예술적 향유란 곧 계급사회에서 신분질서를 공고히 하는 
    한 수단이다. 상층 신분은 언제나 하층과 구분되는 문화형태를 갖추려고 애쓰는 
    반면, 하층 신분은 사회적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일차적 수단으로 상층 신분의 
    고유성격 같은 문화 형태를 모방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문화적 위계질서에 혼동과 파괴가 일어나게 되고 나아가서는 
    지배층이 금기 시 했던 문화적, 예술적 제한 사항을 뛰어 넘어 바야흐로 아래로
    부터 일어나는 새로운 기초가 형성된다.
    
    "일반적으로 공인되어 있는 것처럼 민화가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갑자기 그 
    실세가 드러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양대 국란을 치르
    면서 지배층의 문화적 권위나 기능이 상실되고, 상대적으로 유구한 세월 동안 
    민중의 핏속에 맥맥히 이어져 왔던 토박이 사상이 고개를 들었던 전환기의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11)
    
    민화의 발생에 있어서 18세기 민화는 단순한 기법상의 문제만으로서 주목되는 
    바는 아니다. 그것은 민화에 있어서도 당시 학문의 경향이나 문화사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특징이 자아의 각성이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보다 더 
    주목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민화는 18세기 사회변동 속에서 나타난 신분질서의 
    개편과 새로운 수요층, 곧 요호 여염집이나 19세기 민간계층의 기호와 미적 
    정서에 맞는 독창성 넘치는 형식미를 보여주는데 그 의미가 있다 하겠다.
    
    구체적으로, 의미와 내용, 형식이 합치되었던 18세기 상류층 민화의 정형을 
    무시하고 그 형식을 차용하여 18∼19세기 요호 민중 자신들의 생활 감정이나 
    바람, 신앙에서 비롯된 풍부한 상상력과 장식성을 가미한 민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때의 민화는 때로는 치졸하고 때로는 왜곡되어 어색하기도 하지만 제멋대로
    까지 해석하게 되는 나름의 매력이 있으며, 민중 그림으로서 건강하고 솔직한 
    삶의 정서와 자유분방한 아름다움을 전달해주는데, 또한 그 의미가 있다 하겠다.
    
    결과적으로 민화의 발생은 18세기로, 독자적인 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하려했던 
    민중들의 대응 문화적 해방의 힘과 시대적 역동성이 담겨 있는 것이다. 
    
    
    
    2-2-2, 민화의 시기적 선후관계
    
    민화의 시기적 선후관계에 대한 명확한 해석은 사실 곤란하다. 왜냐하면, 
    민화가 언제, 어떻게 시작했는지에 대하여 알려주는 구체적인 문헌기록이 
    별로 없는바, 현존하는 민화를 통해 그 기원을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어려움에는 또한 궁중의 장식화와 낙관이 없는 잘 알려지지 않은 화공의 
    작품을 모두 민화로 취급함으로써 그 발생에서 시작하여 변천, 전개 과정을 
    밝혀내고 미적 특성을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민화가 틀에 박힌 생활화로 양식적 변화가 규칙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대부분 다양하고 잡다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그 변화가
     일관성 있는 발전 단계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선후 관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불규칙하게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은 그들이 회화양식을 고수하고자 하는 뚜렷한 자부심도 없었던 
    데다가 무엇보다도 정통회화 가운데 좋다고 생각하는 부분 부분을 아무런 
    저항감 없이 필요에 따라 채용해서 그려왔기 때문이다.
    
    
    . 민화의 해학적 성격과 특징
    
    
    
    "민화의 성격은 상류층의 장식화와는 다른 18, 19세기 그 독특한 형식적 특징에
    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12)
    
    어느 나라든 예술에 있어서 일반 서민들이 우러러 볼 수밖에 없게 권위를 나타
    내면서도 화려하고 품위를 갖춘 예술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
    어서, 조선의 예술에서도 위엄과 품위를 나타내고 있는데, 궁중, 양반가의 
    예술로서 도화서에서 정규수업을 받은 화가나 그에 버금가는 화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따라서 이와는 반대로 민중의 생활 문화로서, 사대부가의 예술에서 
    벗어나 독자적 자기양식을 창조한 그림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민화인 셈이다.
    
    이러한 민화는 19세기로 내려올수록 그 본래의 내용과 무관해지면서 자신들의 
    정서에 맞닿는 자유분방한 형식미를 창출하고 있다.
    
    조선시대가 낳은 놀라운 미술의 걸작, 즉 민화는 꾸밈없이 살아온 서민의 
    그림이다. 이런 그림을 구입하고 좋아한 사람은 사대부 양반이 아님은 분명하다.
    
    민화는 떠돌이 화가나 지방의 그림쟁이들이 서민들과 함께 한 그림으로써,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을 위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이며, 
    어느 정도 문자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싸게 팔았다고 본다.
    
    이러한 이유에서 민화는 민속적 유물일 수도 있고 역사적 유산일 수도 있게 된다. 
    살펴보면 민화가 민속화로써 지닌 적극적인 미감美感은 그간의 일반회화에서 
    볼 수 없는 미감이 있다. 민화의 표현에는 해학적 성격과 특징, 즉 독특한 한국 
    맛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화와 일반회화의 조형적 가치처럼 동일한 
    조형원리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물론 민화도 회화의 한 분야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전통적 회화는 먹의 농담
    처리와 설채設彩라는 재료 및 기법상의 특징으로 화면의 깊이나 대상의 
    리얼리티가 보다 효율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민화는 
    이처럼 전통회화의 사군자라 수묵화처럼 감상화의 격식을 차린 그림이 아닌 
    자연스러운 표현이기에 친근함이 더하는 그림이다.
    
    한편, 민화 속에는 불교나 유교의 지향하고 있는 그런 이념의 요소가 있지만, 
    민화가 진정 이것들과 구별되는 것은 그 표현의 매체나 방법이 토착적이고 
    민중적인데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민화는 확실히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고 있다.
    
    좀 더 언급하자면, 민화의 정신은 무엇을 어떻게 잘 그리느냐는 것보다도 
    부적처럼 주술적인 내용을 소재의 세계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크게 
    관심을 보인다. 이때 대부분 화가의 서명이 없고 그림의 솜씨도 어딘가 덜 
    세련되었으며, 그리는 사람이 달랐지만 기술적으로 표현이 비슷한 것이 많다. 
    이는 또한 특징적인 면에서 서로 "모방한 것이 많다"13)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민화가 기술적으로 세련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시각이 될 수 있다. 그들은 민화를 어떻게 어울리게 그렸는가가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 속에는
     해학적인 새로운 자유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화는 주변의 생활과 자연에 접하는 삼라만상이 모두 그림의 소재가 되고 
    있는데, "민화의 소재들은 그 자체가 화가의 임의의, 혹은 창의적인 선택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음양의 상생상극의 자연적인 원리에 부합되는 대상을 
    재발견한다는 의미에서 복제되었으며, 이런 자연스러운 소재가 곧 인간의 
    감정이나 사상을 해학적으로 의인화하고 있다."14) 이처럼 민화의 소재가 
    자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자연이 지니는 조화의 사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민화의 매력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선과 색 면이 섬세하게 결합됨으로써 
    장식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해학적 감성을 유발하는데 있다.
    
    한마디로 한국의 민화에는 질, 크기, 쓰임새, 재료 등에서 다양하고 모두가
     생생한 빛깔로 그려졌으며, 표현에 있어 생동감이 없기도 하지만 자유로운
     해학적 상징을 갖고 있다.
    
    
    
    3-1, 사대부의 감상적 회화와 서민의 해학적 민화
    
    사대부의 미술과 서민의 민화가 현격하게 다른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 계층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 내지 사고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사대부 
    회화를 지적, 정서적情緖的 차원의 수준 높은 교양인의 그림을 말하는 반면, 
    조선시대 후기 민화는 서민들의 세계관을 표현한 것으로 고유한 독자성이 있다.
    
    사실 민화는 그 연원이 사대부 회화에 두고 있는바, 민화는 종종 그 표현의 
    제반영역에서 사대부 회화를 자유롭게 모방하고 변형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사대부 회화의 주제와 기법을 오랜 세월동안 모방하는 가운데, 
    민중적 삶의 양식에 의해 민중화되면서 정착된 것이 민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민화가 사대부 회화에서 따 온 주제, 소재일지라도 항상 비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가치 감정 상징형으로 일반화되었다.
    
    물론 지배층의 문화와 토박이 사상이 전혀 이질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써, 공존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대부회화와 민중성 성향의 결코 대립적인 
    것이 아니며, 그림이 담고 있는 목적하는 바의 영역이 다르므로 대항이라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민화에 나타나 있는 원색적 욕구의 차원의 가치 감정이나 
    사대부 회화에 나타나 있는 고차적 이상추구의 가치감정 모두 민족성의 가치 
    있는 핵심을 드러낸 우리그림이다. 그리하여 민화는 사대부 회화에 대한 대항
    세력이 아니라 사대부 회화가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영역을 채워주었던 또 
    하나의 독특한 회화양태였던 것이다.
    
    
    
    3-2, 종교성과 생활성
    
    예술적 가치를 보면 자연히 한 시대 문화의 전성기를 주목하게 되는바, 오랜 
    옛날로부터 인간은 어떤 절대적인 힘과 초능력에 대하여 이를 인식, 그 실체를 
    확인 파악해 보려고 노력해 왔는데, 민화에서도 주제, 소재들이 넓게는 
    무교시대 즉, 삼한시대의 신전인 용궁과 관련되고 있다고 본다.
    
    당시 무교시대는 물고기, 거북, 용, 십장생, 토끼, 까치, 불로초 등은 모두가 
    낙원의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민화는 이처럼 고분문화시대를 기점으로 해서 
    사라져버린 무교시대의 유산이며 그것의 민중적인 전승과 재흥이라 할 수 있다.
    
    살펴보면 민화는 종교그림으로 무교, 도교, 불교, 유교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한국 문화 속에는 일찍이 정령숭배(애니미즘)가 퍼졌었고 다음으로 무당에 
    따른 정령의 조화를 찾게 되었는데, 민화에서도 이 같은 오랜 생각이 흔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민화는 한국사람들의 현실의 삶과 마음속의 가치 사이에 놓여진 
    무지개 다리의 구실을 한다. 이를테면, 민화는 성공의 바람, 사랑, 행운, 모험, 
    자손 등으로 가르침, 병고의 치료, 은신처의 구실을 한 것이다.
    
    민화가 등장하는 조선은 정치, 사상, 윤리 등 모든 분야에서 유교를 기본이념
    으로 하고 있으나 불교, 무속, 풍수지리설과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간신앙 
    등도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처럼 민간신앙이 시대를 초월하여 
    일반 생활문화에 끼친 영향은 여러 가지 있다.
    
    "사는 것이란 괴로움을 이기는 것이라고 불교에서 가르치고, 불평 없이 괴로움을 
    참으며 사회 속에서 주어진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아래 사람의 섬김을 받아가며 
    위안을 찾자는 것이 유교의 가르치는 바다. "15) 이는 내세보다는 현세에 중점을 
    두는 생활태도, 즉 실직적인 생활에 충실하며, 청렴결백과 절개를 숭상하고, 
    외형적으로 검소한 마음으로 안정과 즐거움과 여유를 갖는 것이 조선인의 
    생활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볼 때 불교와 유교문화가 
    우리 기층문화基層文化와 어울리거나 억누르면서 정신적인 흔적을 남겼다.
    
    그리하여 민화는 다른 시대의 그림 보다 특히나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민족의 적나라한 본성이 꾸밈없이 나타나 있는 바, 고차적 욕구보다는 
    원색적 소망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민화는 순수한 조상의 표현으로 어떤 상징도 특수한 한 가지 종교에 
    속한다고 할 수 없으며, 우리 겨레의 실화와 종교, 정신이 깃들여 있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조상들에게는 죽음이나 질병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신앙의 문제에 대한 규약은 없었는데, 민화의 대부분의 
    내용이 불로장생과 관련이 있으며 "벽사 邪와 기복祈福의 뜻을 담고 있다."16)
    
    사실 장수와 복의 상징은 삶에 절대적인 표상이다. 복을 받아 오래 살면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바람은 공통된 인간본연의 심성이요 교리를 초월한 
    하나의 믿음이다. 이러한 민화를 그린 사람들은 결코 미학적인 기준에 의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민화란 위에서 언급한 바, 일상
    생활에서의 실제적인 필요에 의해서 그렸으며 소박하고 원색적인 삶의 소망에
     따라 그려진 생활화였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은 한편으로 기복을 방해하는 잡귀나 악귀들을 쫓는 벽사 신앙과 
    연결되며, 액과 나쁜 병을 물리치는 주술적 사고가 따라다니는데, 샤먼들의 
    음악주술과 마찬가지로, 화공들은 민화에 일종의 조형주술의 기능을 수행한다.
    
    민화에는 이처럼 주술성이 있는 바, 신화적인 상징이나 주술의 기초 체계
     없이는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관념형태에서 우리는 샤머니즘적 
    사고 기능으로서의 민화를 이해하게 되는데, 이런 기능을 부적이라고 한다.
    
    이처럼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민화는 민중의 한을 풀어주고 막아주는, 
    부적이므로 그것이 상층문화에 흡수되지 못한 까닭도 그 점 때문일 것이다. 
    민화의 존재가치는 서민의 삶 속에, 마음 속의 위로와 북돋음이 필요하다는데 
    있고, 민화는 분명 이를 채워주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편으로 민화는 높이 있는 예술을 일반의 생활 속으로 끌어낸 것이데, 
    그것이 민화라는 장식을 띤 것으로 선비나 은둔자들의 전유물이었던 
    풍류놀이가 일반민중의 관심 아래 오랜 풍속으로 전해져 온 것도 있다.
    
    ·생활성
    
    "조선시대의 미술을 민속 미술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회화, 공예, 조각, 
    건축 등 모든 분야의 많은 부분이 생활문화에 기반을 둔 소산이기 때문이다."17) 
    특히, 조선 후기 민화는 보다 밀착된 생활문화의 소산으로, 소박한 생활의 
    필요 욕구에 따라 부담감 없이 자유롭게 전해 내려오는 도상의 틀을 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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